하혜희, 시 「낭독: 개 선언문」 / 《다음 시 페스티벌 ― 다음 시를 위한 선언》 다음 시 페스티벌 집행위원회, 2020.
낭독: 개 선언문
뒷동산에 오르면 간혹 개들이 보였습니다 언제부터 살았는지 사람한테는 오지도 않고, 부스럭부스럭 희끗희끗 저거 뭐야? 어디? 저거 개지? 어디? 맞네
우리는 가고 있는 사람이야, 지나고 있는
시요? 그거 개 같은 거 누가 그딴 걸 신경이나 쓴다고 나도 안 써, 선언은 다 무엇이며 다음은 또 무엇이고
어디의 무엇
개 같은 세상 속을, 알잖아요 다들, 진짜 못 견디겠는, 근데 또 엄청 견뎠지 엄청 엄청
어엄청, 언제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안 죽었다, 죽겠지만, 당신도 나처럼
언제부터 살았는지
기뻐, 기쁘라고, 당신에게도 기쁘라 기쁘라 하네, 내게 세상이 그러는 것처럼, 시간이 되면 시간을 알고, 뭐야? 뭐 하는 거야?
자꾸 개의 귓등과 머리와 등허리에 손을 얹고 싶어지는 듯이, 우리 정수리 위로, 부주의한 아이나 무심한 노인처럼 임종이 뻗쳐오는 것이, 기쁘라 기쁘라 하며
등허리를 쓰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야
하루하루 억울하고, 정확히 뭐가 억울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손잡았던 사람들이 손 놓듯, 난 돌아 버리겠어, 돌아 버리는 게 맞는 듯, 그러지 않는 게 맞다는 듯, 너도? 너처럼
이거 이렇게는 안 돼, 저건 아무 말도 안 돼, 그 새끼도 짜증, 저 새끼도 짜증이야 도망 못 쳐 다 그렇지 뭐 그러다 괜찮을 때도 있고 목 코를 물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괜찮을 때도 있어? 동산의 개새끼들은 사과 껍질 따위 냄새를 맡고, 던져준 떡 같은 걸 먹으면서 희끗희끗 자기를 보여 주고 도망치고, 우리는 가는 사람이야
어디의 무엇, 도망을 치고
시라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은
빚이 없는 세상의 시여야 합니다
그것은 군대가 없는 세상의 시여야만 하고
파산과 유산이 없는 세상의,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선을
각자가 받아 든 세상의 시여야 합니다 한계를 선물받은 세상의 우리가, 어디의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모르더라도
그래서 우리가 몰아주기 되지 않는 세상의, 우리가 드디어 자신을 나눠 갖는 세상의, 드디어 자신을 얻는 세상의, 개 같은 세상의, 홀가분한
우리가 말려 있는 긴 줄처럼 느끼기를 그친 세상의 시여야 하고, 풀리기 시작한 세상의 시여야 하고, 서랍인 듯이 있지 말아야 하고, 드디어 서랍인 듯이 있게 되는,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그래선 안 되고 그렇게 되는 세상의, 죽음이 죽음이고 개들이 개들인 세상의 시여야 합니다 빗대어 말해도 슬픔 없이, 내가 개와도 드디어 손잡고
손 놓는 세계의 (상황이 급박해 여기까지만 합니다)
공공그라운드에서 2020년 10월 24일 진행된 《다음 시 페스티벌 ― 다음 시를 위한 선언》에 하혜희의 시가 전시되었습니다.
